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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린 청춘여행] (6)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머문 숙소

노란 벽에 하얀 천장…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러시아에서 보낸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그곳
낯선 장소에서의 생활은 여행의 깊이를 더했다

시민기자 박채린 webmaster@idomin.com 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여행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 우선 낯선 풍경을 눈에 담고 역사적인 장소들을 돌아보며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을 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은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얕고 넓은 체험으로,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각 장소에 대한 감각적인 기억력이 분산되기 쉽다. 그렇다면, 이동이 끝이 없는 여행에서 시간이 가장 오랫동안 멈추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숙소가 아닐까. 숙소는 집을 떠난 여행자들이 묵는 장소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단어지만, 단어 자체에서 영 따뜻한 온도를 느낄 수 없으므로 대신 '집'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집의 풍경과 그곳 특유의 냄새, 집에서 듣는 바깥 새 소리나 집안의 라디오 소리, 타인이 움직이는 소리, 몸에 닿는 낯선 이불의 감촉, 어느 순간 잠이 들 때의 영원한 시간, 여행의 좁고 깊은 체험은 바로 집에서 이루어진다.

혼자 여행이 처음이었던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전하게 호텔이나 호스텔에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 고작(?!) 안전 때문에 여행의 묘미를 통째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기 2주 전, 나는 에어비앤비에 올라와 있는 집 목록 중에 가장 마음에 들고 후기가 괜찮은 곳을 골랐다. 1박에 서비스 요금까지 포함해서 3만 원 정도였다. 여러 군데에서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집에만 머물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때 묵은 방. /박채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밤늦게 도착했다. 야간 택시를 타고 마음을 졸이며 도착한 티그로바야의 한 아파트. 호스트인 에브게니가 1층의 현관문을 활짝 열고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주었다. 큰 입과 진한 미소 주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온화한 기운이 풍겼다. 택시에서 짐을 꺼내고 동그란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현관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시멘트와 페인트,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섞여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완전히 낯선 곳에 들어서버렸다.

내가 머물 곳은 8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돌자 민트색 계단과 벽이 보였다. 그쪽으로 걸어가다 '44'라 적힌 집 앞에서 에브게니는 내게 열쇠로 문 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래위로 두 개의 열쇠 구멍이 있었는데 오로지 위쪽 구멍만 밖에서 잠그고 열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아래쪽 열쇠 구멍은 집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약간 번거로웠지만 아주 안전해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숙소였던 낡은 아파트와 계단.

내가 묵을 방은 연한 노란빛 벽과 하얀 천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WWF(World Wildlife Fund·세계 자연 기금)에서 일하는 에브게니답게 방에도 통나무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방문 쪽 벽에는 형형색색의 토끼 스탬프들이 찍혀 있었다. 에브게니의 어린 아들이 집에 왔을 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란다. 분홍 꽃과 초록 풀잎이 크게 그려진 이불 아래로 널찍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내가 러시아의 밤을 추워할까봐 두꺼운 겨울 이불도 따로 마련해주었다. 창문 쪽으로 다가가니 커다란 책 선반이 있었다. 모두 러시아어로 된 책이었는데, 책 사이에 스피커가 교묘히 숨어 있었다. 곧 리모컨을 발견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밤에 음악을 더했다. 천장에는 조명이 없었고 왼쪽 벽에 하나, 오른쪽 벽에 두 개의 조명이 있었다.

숙소에서의 티 파티. 러시아 꿀을 빵에 발라 먹었고, 난생처음 사슴 고기도 맛보았다.

이윽고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연두색 리넨 커튼을 치고 겨울 이불을 하나 더 덮고서 설레는 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행지에서는 잠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 7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에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창문으로 달려가서 커튼을 열고 밤늦은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첫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맞은편 아파트의 여인이 가운을 입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발견한 순간 저기까지는 꼭 걸어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 방에 설치된 선반. 책들 사이로 작은 스피커가 있다.

아침 8시가 지나니 부엌에서 라디오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에브게니는 매일 아침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먹고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라디오에서 재밌는 이야기라도 나오는지 가끔 껄껄껄 웃기도 한다. 그는 운동복을 갈아입고 아침 2시간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러닝을 하러나갔다. 돌아와서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직장으로 향하는 순서를 늘 지키는 것 같았다. 나는 아침에 일찍 눈을 뜨긴 했지만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외출 준비를 늘어질 듯이 느긋하게 했다. 에브게니가 나가고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가볍게 걷다가 브런치를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햇살이 들어오는 발코니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에브게니네 집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바로 코너에 있는 발코니였다. 티 파티를 했던 거대한 나무 책상을 시작으로, 유리로 된 통로를 지나면 넓지는 않지만 온전한 발코니가 등장한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치 절벽 가운데에 이 발코니만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체적으로 크지 않은 아파트인데, 코너 쪽에 발코니를 마련해두니 공간감이 극대화되었다. 셋째 날에는 이곳에서 해가 질 때까지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쓰고 잠시 낮잠을 자며 푹 쉬었다. 몰아치는 바람은 유리가 다 막아주니 포근한 햇살만 가득했다. 아파트 주변에는 거대한 숲이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반짝였다. 마지막 날 밤에는 발코니의 창문을 열고 저물어가는 태양 뒤로 짙은 밤하늘이 펼쳐질 때까지 두고두고 바라보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호텔이 아닌 누군가가 사는 집에서의 완벽한 은둔이었다.

네 번의 밤을 지내고 다시 한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빈집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발코니를 돌아보았다. 방바닥 청소를 깨끗이 하고서 짐을 챙겼다. 신발장에 놓인 에브게니의 엽서가 마음을 더욱 뭉클하게 만들었다. 멈출 때마다 긴장해야 하는 엘리베이터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1층에 있는 44호의 우편함에 열쇠를 넣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저 아파트로 다시는 들어설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행 티켓을 끊지 않는 한, 이곳은 이제 나의 현재가 아니라 영원한 과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내가 오늘도 집에 올바르게 찾아왔군!' 하고 생각하게 하는 이 아파트 특유의 냄새도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도 그 냄새는 다시 의도적으로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흔적이 묻어 있는 낯선 집에서 살아보는 일은 여행에 깊이를 더한다. 타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며칠이라도 그 패턴에 나를 새롭게 맞추는 경험은 특별하다. 타인의 집을 경험하고 나면 너무나 익숙한 내 삶터도 '내가 잠시 머무는 여행지 중 하나'라는 생각이 싹튼다. 삶과 여행, 둘 다 영원하지 않다. 그렇지만 여행은 삶과 달리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지루한 일상에서도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다. <끝> /시민기자 박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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