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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더디지만 오늘도 가족 위해 버텨냅니다

"명절 기분 못 내" 설이 고달픈 사람들
이전보다 확고해진 꿈과 목표에 스스로 믿기로 한 취업 준비생
휴직 7개월째…앞날 막막해도 당당한 가장 되고픈 조선노동자
차디찬 방·고단한 몸·긴 침묵…일기·시 쓰기로 위로받는 어르신
설에도 묵묵히 살아가는 '일상'

문정민 기자 minss@idomin.com 2018년 02월 14일 수요일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설 명절에는 많은 이들이 가족, 친척, 친구 등 모처럼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며 의미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설이 반갑고 즐거운 것만 아닙니다. 가족 보기가 마냥 편치 않은 취업준비생과 경기 불황으로 휴직 중인 노동자, 찾는 이 없는 홀몸 어르신은 설 명절이 그다지 달갑지 않습니다. 이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취준생

대학 입학 때만 해도 호기롭게 놀러다녔습니다. 군대 다녀와서야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한마디로 정신 차린 거죠. 복학생이 된 후 전공 공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학과 성적이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어학도 꾸준히 공부하며 실력을 쌓았죠. 꿈과 목표가 있었고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덜컥 휴학을 했습니다. 전공 공부만으로는 취업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좀 더 취업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분야로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고심 끝에 진로를 바꿨습니다. 문득 스물일곱이란 나이가 적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달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 부모님은 사실상 '백수'인 아들이 걱정스럽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는다. 할 수 있다고. 잘될 거라고.

휴학하는 동안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공부하고 취득했습니다. 꿈과 목표가 바뀌었지만, 전보다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사실 여러 방향을 두고 미래를 설계하는 친구를 보면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과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맞을까.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이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집안의 장손이라 어렸을 때부터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모두 저만 바라보는 것만 같았죠. 부모님은 사실상 '백수'인 아들이 걱정스러운지 다양한 길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지금에야 부모님 마음을 이해하지만, 처음에는 왜 기다려주지 않을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현재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번 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할까 생각했습니다. 친인척들 취업 관련 질문이 쏟아질 게 분명하거든요. 망설임 끝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기로 했습니다. 스스로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달 드디어 졸업을 합니다. 압박감이 더 커지겠죠. 매일 최면을 겁니다. '할 수 있다. 잘 될 거다'라고. 머지않아 주문이 걸리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가족에게 미안" 휴직 노동자

이른 아침 곤히 잠든 아이를 깨워 세수를 시킵니다. 밥을 챙겨 먹이고 옷을 입힙니다. 가방을 들쳐 메고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섭니다. 얼마 후 도착한 곳은 어린이집. 아이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립니다.

7개월째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현재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안일밖에 없거든요. 이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직장에 다니는 아내에게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6월까지만 해도 하루의 풍경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10년간 몸담아 온 조선소로 향했거든요. 다음 날에도, 다음 달에도 현장을 누비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7개월째 조선소 무급휴직 노동자. 휴업 대상자 확정 안내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 실업자와 복직자의 갈림길에 놓인 시간이 길어지면서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수년째 이어진 조선업 최악의 불황이 결국 일터를 덮쳤습니다. 회사는 존폐 갈림길에 섰고 때 묻은 작업복을 잠시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해 7월 무급휴직에 들어갈 때만 해도 한 달이나 두 달 뒤에는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막연한 기대감은 얼마 가지 않아 불안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달에도 어김없이 '휴업대상자 확정'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실업자와 복직자의 갈림길에 놓인 시간이 길어지면서 앞날이 막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9살 난 딸과 5살 아들은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습니다. 매달 넣던 적금도 해지했습니다.

요즘 무얼 하느냐, 회사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보다 더 힘든 건 자괴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창 일하고 있을 때, 집에 멍하게 앉아 있노라면 박탈감이 밀려옵니다.

매년 설이면 양가 부모님께 선물을 사다 드리고 용돈도 챙겨드렸습니다. 여유가 되면 아내와 아이들 새 옷을 사주며 명절 기분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설에는 용돈은 고사하고 번듯한 선물조차 제대로 사지 못할 듯합니다. 명절 스트레스를 새삼 깨닫습니다.

마흔다섯 가장은 당당한 남편이자 아빠를 꿈꿉니다. 더 이상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 연휴가 끝나면 고대하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외로운 나날 중 한날일 뿐" 홀몸 어르신

언제나처럼 창문 틈새로 스며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떴습니다. 밤새 차디찬 공기에 짓눌린 몸을 일으키는 데 뭔가 이상합니다. 오른쪽 팔과 다리가 어쩐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입도 무겁게 달라붙었습니다. 아무래도 '풍'이 온 것 같습니다.

멀쩡했던 몸이 갑자기 고장 나버린 기계처럼 멈췄습니다. 하릴없이 꼼짝 않고 누웠습니다. 이불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시린 기운이 매트를 뚫고 송곳처럼 찌릅니다.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방. 언제 했는지 모를 흰밥이 딱딱하게 굳었고, 먹다 남은 김치찌개는 냉랭하게 식었습니다.

부엌 딸린 단칸방은 늘 그렇듯 적막에 잠깁니다. 5개월 전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문밖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난 3년간 폐지를 주우며 어찌나 돌아다녔던지 무릎이 닳아버렸거든요.

냉골 같은 방에서 점퍼 하나 입고 버티는 홀몸 어르신. 일흔다섯 번째 맞는 올겨울은 유난히 혹독하고 매섭다. 언제 했는지 모를 흰밥과 김치찌개는 차갑게 식었다. /문정민 기자

홀로 삼키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람이 고프고 태양이 그립습니다. 그럴 때면 외로움을 달래고자 책을 읽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일상을 기록한 일기나, 살면서 느꼈던 감정을 시로 옮깁니다. 단 빛이 드는 오후에만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전기를 아껴야 하거든요. 수도와 가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달 들어오는 기초연금 20만 원이 유일한 수입입니다. 방값 10만 원을 내고 남은 10만 원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면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보증금 200만 원은 혹여 제가 죽거든 화장비용으로 남겨놓을까 합니다.

남한테 도움을 받는 게 염치가 없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역 주민센터에서 기초수급자로 지원을 해준다고 했을 때 고사한 이유입니다. 타국에 있는 딸이 어쩌다 전화를 하면, 행여 부담을 줄까 일부러 쌀쌀맞게 대합니다.

일흔다섯 번째 맞는 올겨울은 유난히 매섭고 혹독한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삶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설 명절은 고독하고 쓸쓸한 나날 중 한 날일 뿐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지쳤습니다. 그런데도 13년 전에 먼저 떠난 아내 얼굴이, 연락 끊긴 아들 녀석이 사무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가슴이 미어져 애써 지우려 했던 얼굴들을 오늘 밤에도 꾹 눌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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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민 기자

    • 문정민 기자
  • 경제부 기자입니다. 유통.공공기관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보나 문의 내용 있으면 010-2577-1203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