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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폭격 거부' 찰나의 판단, 민족사 구했다

[기록의 힘] 짧은 인생, 긴 역사 고(故) 김영환 장군
한국전쟁 당시 폭격명령 불복종, 해인사 화재 막고 지켜내
전시 상황서 상부에 '항명' 문책 때는 대장경판 언급
소중한 우리 유산임을 역설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webmaster@idomin.com 2018년 06월 22일 금요일

매년 6월 9일은 세계 기록의 날이다.

세계 기록의 날은 2007년 국제기록관리협의회(ICA)가 기록의 중요성 인식 확산을 위해 국제기록관리협의회 창립일인 이날을 세계 기록의 날로 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위해 국가기록원은 지난 8일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서 '기록의 날' 기념행사를 열었다.

행사 내용 중 소중한 기록유산을 안전하게 보호한 분에게 수여하는 감사패 증정식이 있었는데 대상이 고(故) 김영환 대령의 아들 김정기 씨다.

김영환 대령은 누구일까?

해인사 누리집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그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처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해서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섰다.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고(故) 김영환 대령. /경남도민일보 DB

1951년 9월 18일,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 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 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 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어 투하했으면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의 소재지를 파악한 정찰기가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폭격지점으로 가리키자, 즉각 미 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런데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인민군의 지상 포화가 교차하는 속에 기총소사로 공격하던 비행 편대에 다시 정찰기로부터 폭격 재촉 명령이 떨어졌다.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령을 들은 기장들은 인민군들이 공격을 피해 해인사로 몰려가고 있으니 빨리 폭격을 하자고 편대장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 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김영환 대령은 전시 상황에서 명령에 불복종했다. 평시에도 명령 불복종이나 지시사항 미수행은 인생을 건 결단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결정인데, 전시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 일로 이승만 대통령은 '말 안 듣는 김영환을 포살(砲殺)'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한 공군 참모 총장의 배려로 다행히 즉결처분은 모면하게 된다.

김영환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지켜낸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사진은 대장경판. /전가희

김영환 대령이 명령에 불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 불복종에 대한 문책 당시 대령이 한 말이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고자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려들의 헌신 말고도 김영환 대령 같은 기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현재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 현재 경상남도기록원 전시실에 소개되고 있는 경남의 자랑스러운 보물인 팔만대장경은 지금은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해주니 일반인들도 그 중요성을 쉽게 알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특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그때, 그 가치를 알고 전시에도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사실은 내가 기록연구사인 것을 떠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2010년 8월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앞 탑 마당에서 봉행된 고(故) 김영환(1921~1954) 공군 장군 '문화훈장 추서 및 호국 추모재(齋)'에 참석한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유족들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에서 말한 내용 중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는 대목을 읽으며 '갑자기'라는 말을 눈여겨보았다. 김영환 대령은 '갑자기' 그 '찰나'의 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상황은 매우 급했을 것이다. 공비들의 위치는 탐지되었고 미군은 폭격을 명령했고 본인뿐만 아니라 휘하의 기수들은 폭격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만 지나면 임무를 완성한 후 상관들의 인정과 동료와의 축하와 함께 상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에 항명 곧, 죽음을 걸고 지시를 거부했다.

공비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소탕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서로 윈윈하며 모든 것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지금 내가 편안히 앉아 기록의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기에 말할 수 있는 대안이다. 전시에, 판단의 순간이 '찰나'였다면 기록연구사인 나조차 과거의 사실, 현재 상황, 미래의 가치를 가진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상관의 명령을 거부, 지켜낼 수 있었을까?

본능과 직감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야 겨우 내릴 수 있는 목숨을 건 판단이었다. 감히 짐작하건대 대령의 인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살아온 인생이 누군가에게 경의를 받을 만큼 정성스러운 인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선택이 내 과거의 반영이니 말이다.

지난해 10월 '2017 대장경세계문화축전'이 개막한 합천군 대장경테마파크 안에서 '김영환 장군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1951년 김영환 대령이 지킨 팔만대장경이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약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후손이 국가기록유산을 온전히 지킨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지금 해인사 입구에 가면 그의 공덕비가 있다. 해인사에서 2002년 김영환 대령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옮긴다.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생을 건 찰나의 판단이 그의 후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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