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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추적 이은상] (8) 노산 이은상이 쓴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과 박정희 대통령 묘비문

전점석 마산역사문화유산보전회 운영위원 jjseuk@tistory.com 입력 : 2018-07-03 11:45:15 화     노출 : 2018-07-03 11:58:00 화

노산은 금석문에서도 탁월하였다. 2백여 편의 비문을 남겼다. 유진오 박사는 '국토의 사방 유적이나 선인의 묘비에 노산의 글이 많다. …… 노산이야말로 현대 금석문학(金石文學)의 대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광복회 권영찬 부회장은 '선생의 비문(碑文) 작성에는 당대에 손꼽히는 대가인지라 각계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응분의 사례금과 함께 비문작성 청탁이 쇄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비문과 조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노산은 그의 영전에 헌시를 바쳤다. 이 헌시는 김동진이 작곡하여 (弔歌)로 만들었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영결식은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5년 전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쳤다. 이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시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낮은 음에서 시작하여 고음으로 치달은 뒤에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철학자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영결식 기도는 김수환 추기경과 강신명 목사 등이 하였다. 150호짜리 영정은 정형모 화백이 그렸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에 청와대에 걸어두기 위한 초상화도 정 화백이 그렸다. 이 자리에서 노산 이은상이 작사한 조가(弔歌)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하였다. 국장은 장의 기간이 최대 9일이며 관공서에서는 장례 기간 내내 조기를 게양한다. 이 시는 동작동 국립묘지 박 대통령 묘역에 각인되어 있다. 비문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는 노산의 비통한 심정과 무한한 존경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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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의 운구 행렬.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고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자외다

자유와 평화통일, 그제 님의 이상과 소원

착한 국민되라시고 억센나라 만들다가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

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

육십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

오직 한길 나라사랑 그길에 바친이여

굳센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지을 업적

민족사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다

우리는 슬기론 겨레 어떤 고난 닥쳐와도

끼치신 뜻을 이어 어김없이 가오리다

몸 부디 편히 쉬시고 이 나라 수호신되어

못다 한 일 이루도록 큰 힘 되어 주소서

이 비문은 박정희의 업적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놓았다. 그가 자신의 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민족의 영도자, 역사의 중흥자라는 생각은 국민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대통령이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면권 등 모든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킨 10월 유신에 대해서 '억센나라 만들다가'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굳이 고인의 좋지 않은 부분은 비문에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산도 5·16군사쿠데타와 유신헌법을 나쁘게 생각한 모양이다. 비문만 보면 그야말로 훌륭한 역사적 인물이다. 장기집권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둔 독재자로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엄청난 왜곡이다. 물론 비문을 썼다는 것만으로 노산이 독재 부역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평소에 어떤 관계였으며 권력과 관계 맺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근거 없이 폄하하거나 인간적으로만 존경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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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묘비문.

이 비문을 쓰고 난 한 달 후인 1979년 11월 30일, '육영수 여사 휘호탑' 비문도 썼다. 충북 옥천의 죽향초등학교에는 이 학교를 졸업한 시인 정지용의 작은 기념비와 그 앞에 대리석으로 된 큰 육영수 휘호탑이 서 있다. 탑 뒷면에는 '휘호탑을 세우면서'라는 제목으로 노산이 쓴 비문이 적혀 있는데 '학교에 다니시던 시절 교동아가씨로 불리우셨던 육영수 여사님은 착하고 깔끔하신 성품에 늘 맑은 미소를 띄우셨고'라고 하였다. 노산이 방광암으로 한창 고생을 하던 시기였다. 사실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는 박목월이 쓴 전기(1976년, 삼중당)가 가장 유명하다. 박목월은 이미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있던 1963년에 육영수 여사의 개인 교습을 담당하기도 했다.

30년 친구 박정희를 위한 시인 구상의 진혼시

구상은 1952년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지상에 '고현잡화(告現雜話)', '침언부어(沈言浮語)', '성외춘추(城外春秋)' 등의 개인 실명 칼럼을 통하여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여 여러 차례 신문이 압수당하고 자신은 특무부대에 쫓겨 달성공원 하상부락으로 피신하기도 하였고 정보기관에 출두한 적도 있었다. 이 글을 모아 <민주고발>이라는 책을 1953년에 출판하자 판매금지령이 내려졌으며 결국 <레이다 사건>이라는 이적 혐의를 쓰고 투옥당하기까지 하였다. 박정희(1917~1979년)와 구상(1919~2004년)은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였다. 구상이 국방부 기관지인 진중(陣中)신문 '승리일보'의 편집책임자로 있을 때 박정희의 상관인 이용문을 통해서 알게 된 사이였다. 구상에게는 친구 박정희의 쿠데타는 예상할 수 있는 충격이었다. 3일후 박정희와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을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란 자전시집에 실었는데 미국특사를 권유했는데 자신은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라고 하였단다. 박정희는 구상을 최고회의 의장 상임고문으로 내정하고 친지를 통하여 설득하였으나 구상은 거절하고 경향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떠났다. 그런데 구상은 공화당 정부에서도 몇 차례 필화가 있었다. 1965년 8월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에서 자신이 쓴 희곡 '수치'를 상연하려다가 당국의 공연보류 조치를 당하였다. 희극내용은 귀순한 지리산 공산 게릴라 패잔병 여대원과 전투경찰대 대원이 등장하는 반공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군데의 대사를 문제 삼아 대한민국의 국립경찰을 모독했다는 혐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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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구상.

1979년 10월,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자렛 예수'를 쓰다가 박정희의 피살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진혼시(鎭魂詩)를 썼다.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 그가 앞장 서 애쓰며 흘린 땀과 /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 보사 /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대령에서 대통령 시절까지 인간 박정희와 교우(交友)하면서 남긴 7편의 시 중에서 마지막 편이었다.

12년 전인 외국에서 폐병 수술을 받고 귀국한 구상은 1967년 7월 1일, 중앙청 광장에서 자기보다 2살 위인 친구 박정희의 제6대 대통령 취임 경축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당신의 영광에는 우리의 다짐이 있다 / 썩고 곪은 것은 제 살이라도 도려내고 / 눈 뒤집힌 편싸움과 패가름을 막아서 / 꿀벌과 같은 질서와 화목을 이룰 / 우리와 당신의 굳은 다짐이 있다' 이날, 야당은 서울운동장에서 6.8 총선 부정 진상보고대회를 열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에는 야당이 불참했다.그런 그가 1970년부터 3년간의 미국생활에서 돌아와서 만난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심장으로 너무 달라져 있었다고 한다. 구상은 또 시를 썼다. '그는 샤먼이 되어 있었다 / 그 장하던 의기(義氣)가 돈키호테의 광기(狂氣)로 변하고 / 그 질박(質朴)하던 성정(性情)이 방자(放恣)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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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묘소.

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박정희는 충무공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1962년부터 18년 동안의 집권 기간 중 충무공 탄신기념제전에 열네 번이나 참석할 정도로 숭배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1966년부터 시작된 현충사의 성역화는 1974년에 이르러 42만여 평에 이르렀고 약 30억 원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이은상의 호를 지어준 이광수도 1931년 소설 <이순신>을 썼다. 이들에게 이순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직 나라사랑, '민족반역자도, 독재자도 욕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이든 대한제국이든 국가라면 무조건 받들 뿐이었다.' 성웅에게는 나는 없고 국가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이 충무공에 대해 남다른 존경심을 갖고 있던 노산을 찾게 되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졌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저녁에 술을 먹어도 이은상 선생이나 이선근 박사, 이런 사람들, 문화재 위원이나 원로들하고 자리를 같이'할 정도였다. 이선근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사 가정교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노산은 평소에도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1970년 초에 전라도지역에 막심한 한해가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고창으로 한해지역 시찰을 하기로 하였는데 고창 읍성도 둘러볼 예정이었고 동행자는 문화재위원장인 이선근(동국대 총장)과 문화재보호협회 이사인 노산 이은상이었다. 이때 문화재 안내를 고창문화원이 맡아서 안내하였다. 이선근은 1969년부터 1981년까지 4~9대 문화재위원장이었고 노산은 1967년부터 문화재위원이었다. 이선근은 1972년부터 문화재보호협회 회장이었고 노산 역시 1972년부터 문화재보호협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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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굴혼 박정희 책.

<불굴혼 박정희>(전 10권)의 저자인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는 2017년 5월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주제강연을 하였다. 주제강연에서 고 대표는 노산 이은상이 박 전 대통령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평했다고 인용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요.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비롯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길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최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도 이겼고, 세종대왕도 못 이루었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지난 2013년 11월 14일, 박정희 탄신제에 참석한 남유진 구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반인반신(半人半神)이라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17년 초, 지자체 단체 중 처음으로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하였고 우정국 앞에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촉구 1인 시위를 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 작성

군사쿠데타로 3·15와 4·19를 짓밟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노산은 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을 써주었다. 그런데 창당한 지 한 달 만에 박정희는 주체세력 간의 암투로 인해 공화당 해체를 결심하였다. 4월 8일 언론에 해체 발표를 하기 위해 당의장 김정렬은 창당 선언문을 써준 노산을 찾아가서 해체 성명서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발표시간 직전에 취소되었다. 그후 노산은 계속해서 박정희의 문화행정 자문역으로 1962년 민족문화협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서 박정희 정권의 문화, 교육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자유당 시절에 국회의원이었던 윤치영은 5·16군사쿠데타를 지지하고 1963년 김종필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만들면서 박정희의 민정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같은 해에 윤치영은 안중근 의사 숭모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하였고 이은상은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에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각종 기념사업, 숭모사업에 참여하는 친일파에 대한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63년에 쓴 민주공화당 창당 선언문에서는 '일인 일당을 위한 국헌의 농락과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부정선거의 연속으로 항구적 집권을 꿈꾸던 독재정권과 이념의 빈곤 및 부패로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여 조국을 누란의 위기로 쓸어 넣고 말았던 무능정권은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의 지상과제를 저버리고 조국의 역사 위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도 오히려 뉘우침이 없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왔다. …… 정치상황 속에서 4·19와 5·16 혁명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고 5·16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불과 3년 전에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이순신 같은 분이라고 지지유세를 했는데 갑자기 독재정권, 무능정권으로 매도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단히 낯 뜨거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4·19와 5·16을 모두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바로잡고 민족중흥의 대업을 이룩하려는 민족적 양심의 발로'이므로 '우리는 4·19와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이 나라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게'하기 위해 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한다고 하였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논리적인 전개이며 절실히 필요한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4·19와 5·16을 똑같게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5·16을 혁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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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_탄신100주년 행사.

불과 9년 후에 자신들이 '항구적 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던 자유당과 같은 독재정권이 되기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5·16은 혁명이 아니고 쿠데타이다. 그러나 선언문에는 혁명이라고 표현하였다. 노산은 초안을 썼기 때문에 선언문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의 기본 흐름은 평소 노산의 생각이 담겨있으며 뛰어난 문장에서도 노산을 느낄 수 있다.

노산보다 두 살이 많은 함석헌(1901~1989년)은 '사상계' 1961년 7월호(통권96호)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 꽃은 떨어져야 열매 맺는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어져야 한다'고 했다. 즉 5·16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민정이양을 주장했던 것이다.

노산이 선택한 언론, 교육, 문화 국민운동

평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함석헌과는 달리 이은상의 애국은 강력한 지도자가 분단된 조국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노산은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1964년 4월에 쓴 '대인난(待人難)'에는 그의 안타까운 나라사랑이 담겨 있다. '왜정 36년 동안 헐벗고 매 맞고 하면서도 다만 '그'라고 부르는 '자유와 민주의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마침내 오기는 왔다. 그러나 정작 오고 보니 모습은 비슷한 채 바로 그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또 기다렸다. 6·25가 왔다. 4·19가 왔다. 5·16이 왔다. 그랬으나 번번이 그때마다 기다리던 그는 아니었다. 모두가 얼토당토않은 딴 손님들이었다. 때는 저무는데 우리는 오늘도 아직 그를 못 만난 것이 이리도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한시바삐 만나야 한다. 그러기에 다만 우두커니 서서 언제까지고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가 미처 안 온다면 우리가 가야겠다. 우리가 가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간절하였다. 비록 4·19에 대해서도, 5·16에 대해서도 실망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적극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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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공화당 창당.

그러나 노산이 선택한 방법은 언론, 교육, 문화와 국민운동이었다. 노산은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장, 백범선생 탄신100주년축전 집행위원장, 독립동지회 고문, 범독립운동자대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일제시대 이승만의 비서실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친일활동을 한 윤치영은 이승만 기념사업회장, 독립유공자 유족 중앙회장,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총재,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에 여러 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 정신과 배치된다는 논란도 있었는데 윤치영과 이은상의 활동이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초대 내무부장관,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과는 달리 노산은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

1968년 5월 17일, 창신학교 개교 60주년 기념강연회에서 노산은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는 것, 그 역사를 잘못 이끌어 놓을 것 같으면 커다란 문제가 생겨날 것입니다'라고 방향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전개된 '10월 유신'이라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강연회에서 노산은 '(나라사랑은) 국민과 같이 가야 합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앞에 갑니다. 영양부족증에 걸린 국민 대중이 뒤에 처져갑니다. 그 거리가 멀어갑니다. 거리가 멀수록 독주합니다. 독주한다는 것이 곧 독재자로 전락하는 요인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벌써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계획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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