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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강독(多夕 講讀) (27) 달로써 월영대의 이름을 삼은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국역 우곡선생 문집> 마지막 편

김온달 cpje@naver.com 입력 : 2018-07-03 13:53:47 화     노출 : 2018-07-03 13:56:00 화

우곡선생은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성리학이 뒷받침한 선비의 큰 모습을 구현한 분이었다.

글쓴이는 <국역우곡문집>에 실린 우곡의 여러 글월 중에서 '다석 강독'이 추구하는 큰 줄기인 일원(一元)에 대한 그의 사상을 뽑아보려 하였다. 일원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근원을 말함인데 선비는 일원, 곧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한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말 '선비'는 그 정확한 어원을 알 수 없으나 대개 지식인을 이르거나, 과거공부를 하였으나 관직을 얻지 못한 사림(士林)을 뜻한다. 혹은 얌전하기만 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하기도 하듯이 선비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선비는 우리 한겨레 역사에서 '밝달의 신명을 나타내는 어떤 유구한 흐름'을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로 나타낸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우곡선생과 같은 도학자를 우리말로 형상화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선비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는 그 함의(含意)가 다른 것이다. 사대부가 반열(班列)과 문벌(門閥)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라면, 선비는 마음공부와 수양을 올바로 하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제대로 드러낸 사람이다. 또 타인에게 믿음을 주고 그들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몸을 반듯이 세워서 사람의 길을 걸어가 후세에 이름을 남겨 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는<효경(孝經)>의 가르침에서 '입신행도'가 선비의 것이라면, '양명어후세'가 사대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인격의 도야를 궁극적 목적으로 한 학문이다. 우리가 굳이 도학(道學)이라고 일컫는 것은 성리학을 자못 출세나 영달의 수단으로 삼은 사대부가 많았기 때문이다. 길을 올바로 찾고, 길을 닦아간다는 뜻이 담긴 도학(道學)을 이 시대에서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곡이 그의 스승인 항재 이숭일을 찾아 문답한 '알항재선생문목일기(謁恒齋先生問目日記)'에 특이한 내용이 있다.

질문: 남헌이 주자에게 보낸 글에 호기(豪氣)는 병통이라 하였는데, 어찌 주자에게 일찍이 병통이 있었겠습니까. 남헌의 말에는 크게 지나침이 없습니까.(問南軒與朱子書曰 豪氣是病痛 朱子何嘗有病痛 南軒說無乃太過乎)

답변: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험 삼아 본다면 주 선생은 때때로 비분강개하여 출사표나 이소경 등의 작품을 외웠다. 성인의 조용한 기상으로 본다면 호방한 기상이 밖으로 노출됨이 있는 듯하다. 남헌이 규계한 뜻이 어찌 지나침이 되겠는가.(此未易言 然試觀朱先生 有時悲憤感慨 愛誦出師表或離騷經等作 以聖人從容氣像觀之 則 似有豪氣發露處 南軒規戒之意 豈以爲過也)

남헌 장식(南軒 張)은 남송 때 도학자다. 스승 호굉(胡宏)의 학문을 이어받아 당시 이학(理學)의 큰 학풍을 일으킨 호상학파(湖湘學派)의 기틀을 세웠다. 특히 장식은 육상산(陸象山)과 주희의 관계처럼, 주희와 학문적 교류를 통해 서로의 사상적 성취에 많은 도움을 준 도우(道友)였다. 서로 많은 편지글을 주고받으며 사상적 논쟁을 벌였다. 위의 글도 그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주희가 때때로 비분강개하여 제갈량의 <출사표>나 굴원의 <이소경>을 큰 소리로 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편지글 하나를 보자.

"대체로 군주의 마음은 더욱 제멋대로이고 형세는 더욱 고립되었으며, 현인과 군자는 날로 위축되어서 그의 조정에 서고자 하지 않으며, 남을 참소하고 모함하며 아첨하여서 비위를 맞추고 녹을 지키고 자리만 보전하는 인사가 날로 모여들어서 못하는 짓이 없게 되었습니다. 형과 진 공은 평소 물망이 다른 사람에 견줄 바가 아닌데, 오늘날 비록 재상이 되지는 못했어도 실은 국론을 결단해야 합니다. 만약 보통 사람처럼 시간만 끌고 녹과 지위만 지키고 보전하다가 군주가 싫증 내서 쫓아내기를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가 평소 글을 읽고 배움을 물었던 의도이겠습니까?"

이 글은 주희가 당시 조정에 있던 유공이라는 관료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로 황제를 비롯한 문란한 조정의 실정(失政)을 비판한 내용이다. 주희는 주자학으로 유학을 집대성하였고, 동양철학의 한 꼭대기에 오른 철인이고 학자였다. 그러나 공자가 많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치국평천하'를 위해 주유천하를 하였듯이 그는 평생 국가경영을 위한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는 남송(南宋) 당대의 여러 현자들과 교유하며 지속적인 학문적 성취를 이루면서도 관리로서 국정개혁에 헌신하였고, 혹은 재야에서 끊임없는 정치 참여 활동을 벌였다.

그렇다면 주희가 이런 글을 목 놓아 암송한 그 뜻이 제법 드러나게 된다. 제갈공명과 굴원은 경세가(經世家)와 시인으로 모두 충의지사(忠義志士)다. 주희가 이들의 글을 가까이 한 것은 그의 타고난 성정과 기질에다 편지의 마지막 구절처럼 '평소 글을 읽고 도리에 대한 의문을 물은 목적'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며, 현실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뜻이 막히거나 왜곡될 때 그때의 울분을 호기(豪氣)로써 달래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곡은 그가 존숭한 주자(朱子)가 그의 학문적 벗으로부터 호기는 병통이란 지적을 받자, 어떻게 성현(聖賢)의 경지에 올랐던 주자에게 병통이 있었겠냐는 의문을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항재 선생은 성인의 조용한 기상, 즉 호기(浩氣)로써 볼 것 같으면 주자에게서 발현한 것은 호기(豪氣)라고 짐작한 것 같다. 따라서 남헌의 바른 가르침이 지나칠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답변한 듯하다. 여기에 대해 우곡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 수 없다.

우곡은 그가 죽기 3년 전인 1694년 마산 월영대(月影臺)를 찾아 기문(記文)을 남겼다. 그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구절이 있다.

"월영대는 예날 문창후 최치원선생이 쌓았다. … 대는 두척산 줄기를 북쪽으로 하고 반룡산 높은 줄기를 동쪽에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저도가 웅크리고 있고, 서쪽으로는 구령이 우뚝하며 월영대는 그 중심에 있고 마산 앞바다를 머리에 두었다.(臺古文昌侯崔先生築也 斗尺北也 盤龍峻東也 於南猪島 穹於西龜嶺 而臺中焉濱馬海頭) …

아. 대는 땅에 있고 달은 하늘에 있는데 달로써 대의 이름을 삼은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무릇 한 조각 둥근 달이 능히 천하를 두루 비추니 온 강물과 모든 바다에 어느 물인들 그림자가 없겠는가마는 유독 이 대에서 보는 것이 더욱 절묘하고 기이할 뿐이다.(噫臺在地月在天而以月名臺 其義何居 夫月一片團而能遍照天下千江萬海 何水不影 獨是臺所觀絶奇耳) …

아아, 바다가 아니면 달이 어찌 기이해지며 달이 아니면 대가 어찌 빼어났겠는가. … 또 선생이 아니면 그것을 능히 사랑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 옛날 이백이 달을 사랑하여 술을 들고 달에게 물으며 노래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은 사랑할 줄만 알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의미와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취하여 달을 희롱하다가 채석강에 빠져 죽었으니 달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를 것인가. 무릇 환하게 밝아 어둡지 않은 것은 달의 밝음이다. 때에 따라서 차고 기울며 나아가고 물러남이 달의 도이다.(嗚呼非海月何奇 非月臺何勝 … 而又非先生莫能愛之 … 昔李白愛月 有把酒問月之吟 莫李白若然徒之愛之 不知所以愛之之義 是以醉弄月沈於採石而死 其可愛月云乎 夫皎然不昧者月之明也 隨時進退者月之道也)"

선생은 '월영대기(月影臺記)'에서 달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그가 공부하고 실천한 도학의 요체를 나타내었다. 우선 월영대의 자리가 주변 준령과 바다를 거느린 중심에 위치하였다고 하였다. 흔히 북두성(北斗星)을 가운데 두고 뭇 별이 돌고 도는 것을 태두(泰斗)라 하여 심원한 사상(思想)의 연원에 비유하듯이, 도학의 자리를 곧 월영대에 견주어 말하였다.

또 달의 그림자로 대의 이름을 지은 뜻에 대한 선생의 풀이는 그 의미가 깊다. 원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달과 천강(千江)에 두루 비추인 달그림자처럼 도(道)는 근원이 하나로 있으나 만유에 편재함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마산 앞바다에 비추인 달을 월영대에서 보고 있으면 유독 절묘하고 기이하다 하였다. 이것은 대(臺)가 곧 도의 근원인 달을 보는 군자(君子)로 은유하고, 도학은 달의 밝음처럼 인간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비유했다.

그러나 일원(一元)의 도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만이 그 도를 사랑할 수 있다. 문창후 최 선생 같은 도학자가 아니면 능히 그 도리(道理)를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선생은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이태백마저 달을 사랑할 줄 알았으나 달을 사랑하는 의미와 이유를 성찰하지 않았다고 했다. 취하여 달을 희롱한 까닭에 달의 그림자를 잡으려다 채석강에 빠져 죽음을 한탄했다.

세월은 흘러 사람들이 월영대를 최 선생이 다녀간 흔적 정도로만 여겼고, 마산 앞바다 또한 매립되고 대 주변은 고층 건물이 가로막아 햇볕조차 들기 어려운 보잘것없는 유허(遺墟)로 남았다. 누구하나 보살피지 않은 것은 비단 월영대 뿐이랴.

선생은 말씀했다. 도학은 환하게 밝아 어둡지 않다. 도학은 자연의 순리대로 움직이는 달과 같아야 한다.

다석 가로되 "자연 자체의 변화를 아는 것을 '지화(知化)'라고 합니다. 궁신지화(窮神知化)하여 만물만사의 변화와 변천을 알면 마지막에 가서 자기의 욕심을 알게 됩니다. … 공자의 말씀인 '天地之道可一言而盡也', 즉 '하늘과 땅이 어떻다는 것을 말하려면 한 마디로 다 할 수 있다'는 뜻인데 그 한마디는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중용(中庸)>의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 不貳 則其生物 不測"은 천지의 도가 나타나는 현상은 다를지라도 둘이 아니며,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매우 철학적인 것이다. 사실 우곡의 월영대 기문의 참뜻은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悠也久也"라는 그 다음 문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늘과 땅의 도는 넓고 두터움이며 높고 밝음이며 끝이 없다." 달과 물 위에 새겨진 달그림자처럼 달과 달그림자는 둘이 아니면서도 서로 다른 것인데, 월인천강(月印千江)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석은 천지의 도(道)를 그이가 늘 표현한대로 '하나'라고 풀이하고 그 '하나'의 철리(哲理)는 자연과 그 변화를 알게 되면 지극한데 이를 수 있는데, 마침내 인간의 욕심이 무엇인지 투철히 알아차리면 성현의 뜻을 배울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본다.

우곡선생에게서 우리가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욕심을 여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우곡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이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어 삼가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간이면 욕심을 여읠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다를 바 없이 살다 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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