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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조선소의 어느 여름날

허리띠 졸라매고 고통분담했지만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내몰린 노동자

박보근 노동자 webmaster@idomin.com 2018년 07월 17일 화요일

하지를 찍고 돌아선 지 채 달포가 지나지 않은 한여름이지만 다섯 시를 막 넘긴 창밖은 아직 어둑새벽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내가 깰까 주섬주섬 챙긴 옷을 거실에서 걸치고 고양이 세수로 물을 묻힌 둥 마는 둥 집을 나선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조기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가 한산하다. 아침밥을 사내 식당에서 먹은 지도 수년이 지났다. 외벌이 살림살이 팍팍하여 함께 벌이에 나선 아내에게 아침상을 차리는 수고나마 덜고자 회사에서 끼니를 해결하지만 직장과 집안일에 지쳐 잠든 모습을 보면 늘 안쓰럽고 미안하다.

업무는 여덟 시에 시작하지만 동료들 출근 전에 작업장 도는 일은 입사 때부터 비롯된 버릇이다. 이십 년 전 외환 위기 광풍에 식구들 빈 입만 끌어안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당장 아이들 입에 거미줄 칠 판이라 무작정 새벽 인력시장으로 나가 막노동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나날이었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몰려들어 공치는 날이 많아 살림살이는 늘 궁색하고 빈 쌀독엔 종구라기만 굴러다녔다. 어느 날 아침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사상'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았다. 두 배 가까운 일당을 부르기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손을 들었다. 난생 처음 들어간 조선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사상으로 강산을 두 번 바꾸었다.

사상(仕上)은 마무리나 완성을 뜻하는 '시아게(仕上げ)'라는 일제강점기가 남긴 일본말이다. 조선소에서 철판을 용접하거나 자른 후 그 부위를 그라인더로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을 말한다. 단순 반복 작업이지만 꽤 정밀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라인더조차 처음 본 주제에 한다고 손을 들었으니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작업 속도는 느리고 한다고 해놓은 일은 품질이 엉망이니 온종일 작업반장이나 선배에게 욕을 배터지도록 얻어먹었다. 욕을 먹지 않고 쫓겨나지 않으려 어둑새벽에 나와 숙련공들이 작업해둔 곳을 살피고 다니던 버릇이 이십 년이 되었다. 덕분에 기량이 남보다 빨리 늘었고 인력시장을 벗어나 숙련공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오전 휴게 시간 한 친구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다. 다른 직장을 구하려나 보다. 임금이 어떻게 되는지 노동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꼼꼼히 묻는다. 여의치 않은 모양인지 한숨으로 전화를 끊는 그에게 여태 먹던 조선소 쇳밥을 왜 물리려는지 궁금해 말을 건넸다. 한마디로 일할 맛이 안 난단다. 외환 위기에서 헤어나자고 함께 고통을 나누자더니 다음엔 빵을 키워 나누자며 허리를 졸라매자 했다. 그러나 그 키운 빵은 나눠 먹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썩어 버렸다. 이제 와서는 조선 경기가 불황이니 구조 조정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이다. 보수 언론까지 덩달아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 공적 자금이 들어갔는데 임금타령 한다고 몰아붙인다. 그동안 쇳가루 밭에 뒹굴며 키운 빵이 맛도 보지 못하고 어디서 썩어 나갔는지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렇게 허리 졸라매느라 동결하거나 쥐꼬리만큼 인상되는 동안 최저시급이 만족스러운 수준은 못되지만 제법 올랐다. 그러니 이십년 만에 최고 기량 노동자 시급이 오히려 최저시급 근처에서 도리뱅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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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협력업체는 노동조합도 없으니 주는 대로 받는다. 철판 위로 이글거리는 열기가 햇살조차 도로 태우는 점심시간, 그늘 찾아 고된 몸을 누인 앞으로 초라한 파업 행렬이 지나간다. 고용 유연화 등의 핑계로 이미 하청 노동자가 네다섯 배 많은 상황에서 그들의 북소리는 떨림이 없다. 얼마 전 현대중공업 노조는 협력업체 노동자를 끌어안은 단일 노조를 출범시켰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 양보하면서 북소리 울림을 키워냈다. 서로를 살리는 일이다. 작업을 마치고 청소하느라 쓸어 모은 쇳가루 무더기를 바라본다. 10%의 노동귀족이, 강성 노동조합이 기업을 망치고 나라 경제를 파탄 낼 것인 양 떠드는 사람들을 데려다 오늘처럼 더운 날 저 위에서 하루쯤 용접 작업을 시켜보고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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