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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열전]산청군 산청읍 이명자 할매

"열여덟 때 사진 보며 웃는다…인자 내 세상이라꼬"
너무 어려웠던 살림에 배움 짧아
동무들 함께한 순간은 추억으로
22살 결혼, 통신사 남편 뒷바라지
아픈 시어머니·남편 10년여 돌봐
'평화 효행상'에 자원봉사만 30년

시민기자 권영란 webmaster@idomin.com 2018년 08월 13일 월요일

"인민군이 우리 집에다 대대본부를 차려서 며칠 동안 있었어예. 우리 집이 동네서 크고 대밭도 있고 새미가 있으니까. 어머이하고 이웃사람들이 다 밥해줬다. 밥티꺼리 하나가 얼마나 귀한데 밥을 퍼다가 손에 묻어도 못떼묵았다더라. 무서버서. 내는 어린 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있었던기라. 총소리도 나고…그래도 짬도 모르고 사는기라."

산청군 산청읍 이명자 할매. 1944년생으로 75세다. 함양군 휴천면이 고향이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큰오빠 손에 자라

명자 할매는 한국전쟁 당시 7살이었다. 인민군들이 며칠 내내 함양 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구들한테도 마을사람들한테도 한 번도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자다가 눈을 떠 내가 울라하니까 인민군이 내 보고 '괘안타. 괘안타, 더 자거라, 더 자' 이리 말하던 게 지금도 기억나."

인민군이 다 가고 난 뒤 곧이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집에 책이 많은 것을 보고 조사를 했다. 어린 명자 할매에게도 겁을 주며 물었다.

일흔다섯 산청읍 이명자 할매.

"내보고 아버지 오데 갔노 묻대. 그란데 얼라가 '우리 아버지는 애초부터 없어예'라고 말하더래. 그게 소문이 나가꼬 동네 사람들이 내보고 영리하대는 거야. 저 아는 저그 아버지가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이다면서. 그때는 이장, 반장만해도 다 잡아갔거든. 말이 틀리지는 않았제. 내는 아버지 없이 살았으니께. 우리 어머이가 엄청 고생하고 살은 사람이여."

아버지는 늘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는 서울에 있었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계속 마산에 있었다. 명자 할매가 아버지 얼굴을 보는 때는 제사나 명절 때였다.

"아버지 오면 어려운 손님이지. 아버지가 제사 지내러 오면 작은엄마가 같이 와. 그래가꼬 같이 잤어. 우리 어머이가 참 우떤 맴이었을란고…."

아버지는 많이 배워 지방대학 교수도 하고 제법 번듯하게 살았지만 도시에서 새 살림을 차려 본처와 자식들은 함양 골짜기에 파묻혀 입에 겨우 풀칠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 아버지가 없으니 큰오빠가 살림을 도맡아 책임졌다. 어머니는 억척같이 농사짓고 명주 삼베를 짜서 돈을 만들었다. 명자 할매도 옆에서 뭐라도 거들어야 했다. 당시 여자들처럼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다. 야학에 조금 다녀 글자는 조금 읽고 쓸 수 있어 겨우 문맹을 면한 정도다.

"그래도 내는 동무들과 천지를 모르고 댕겼어. 그때사 가난하기는 온 마을이 다 가난했으께네."

열예닐곱 시절이다. 함양 휴천면과 이웃한 산청 금서면에 양재학원이 있었다. 나이 엇비슷한 동무들과 꼬박 6개월 다녔다. 시오 리를 걸어 배를 타야 했다. 지금은 함양군 유림면과 산청군 금서면을 잇는 유림교가 놓여있지만 당시는 다리가 없었다.

"매일 걸어 댕겼제. 동무들이랑 맨날 오가는 재미지. 강을 건너라몬 장동에서 배를 타고 왔어. 그때가 1963년쯤 되나. 거서 재단하는 거 배우고…. 재봉질도 제대로 못 배웠제. 모조지 사서 원형을 뜨가꼬 그리. 천 살 돈이 없어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어. 너무 어려운 살림을 살아 돈을 못 썼제. 그래도 나중에 재단과가 생긴다더만 촌에 배울 사람이 없다꼬 안 맹글더라고. 학원비가 안 비쌌어. 쪼깨 내고 갔는데."

명자 할매는 그때 끝까지 배웠더라면 뭐라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열여덟 살 시절 이명자 할매.

◇일흔다섯에 되찾은 이름과 자유로움

명자 할매는 22살에 산청읍 박씨네로 시집 왔다.

"총각이 휴천 형수 집에 놀러왔더라. 키가 작아서 첫인상에 맘에 차지는 않았으이. 집도 너무 가난하고. 나이도 내보다 일곱 살이나 많고."

신랑은 우체국 임시직에 29살 노총각이었다. "그래 우째 시집왔는데, 신랑이 우체국 임시직이었는데 내 오고 나서 턱허니 정직원이 돼삔거라. 그 전에는 군에 안 가 쫓겨났제. 박정희 때 군에 안 간 사람들 다 떨라삣거든. 근데 사람이 하도 귀해사니 임시직으로 다시 불러 일하고 있다가 내랑 결혼한 거제."

정직원이 되자마자 곧 창녕우체국으로 발령이 났다. 큰아들을 거기서 낳고 1년 살았다. 산청읍에서 창녕까지는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도 7시간이나 걸렸다. 친정 한 번 오기가 힘들었다. 신랑은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통신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혼자서 공부했다.

"통신사 시험을 진주로 가서 친다는기라. 오데서 첫아들 배냇저고리 옷고름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면 합격된대서 그걸 넣어줬더마 고마 1등으로 합격했대."

명자 할매는 지금도 당시 남편의 합격이 첫아들 옷고름 효험이라고 여겼다.

"그라고나서 함양 안의로 발령 났다. 통신사라는 기 전보를 치고 그런 일 알제…. 거서 1년 하다가 산청 자리가 비가꼬 요리 산청으로 왔삣제. 셋집에 살다가 4년 쌔빠지게 일해가꼬 월급 모아 지금 이 집터를 샀다. 곗돈도 열심히 모으고…. 이 집을 살 때가 내가 서른이 되기도 전인데 당시 돈으로 45만 원에 샀제. 우체국에서 있다가 전화국으로 간께 애들 등록금이 다 나오더라. 애들 셋은 고등학교부터 나오고. 다행이다아이가."

동무들과 모여 수놓는 모습(왼쪽에서 둘째).

집을 산 지 20년이 지나서 헌집을 철거하고 그 위에다 새 집을 지었다. 명자 할매가 이 터에 산 지는 이제 48년이 된다.

명자 할매는 병든 시어머니를 10년 가까이 돌봤다. 거기에다 남편도 7년 동안 아팠다.

"우리 집에 환자가 둘이었다아이가. 시오매가 치매가 와서 똥오줌을 가리지도 못하고, 마루를 기어 다니면 솔방울 같은 똥이 바닥으로 빠져나오거든. 또 울 할배가 누워있고. 할배는 귀가 안 들리고 거기에다 한쪽 눈이 실명이 됐거든. 아이고, 난중에 둘이는 다 못 돌보것더라고. 병든 어른 모시기가 쉽지 않아. 나중에 요양원에다 모셨는데 그서 7개월 있다가 돌아갔구만."

병든 시어머니와 남편을 10년도 넘게 집에서 돌봤다. 명자 할매는 2006년 산청군 지리산평화제위원회에서 '평화 효행상'을 받았다.

"내가 밸시리 한 기 없구만, 배끼 상 받으러 오라데. 믄고도 모르고 갔다아이가."

2010년 시어머니가 98세로 작고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1년 남편이 작고했다. 명자 할매는 그제야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을 했다.

명자 할매는 30년 가까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산청군여성자원봉사단체 소속이다. "내를 찾는 사람이 많다. 다들 재가봉사를 받을 때가 됐는데 내가 봉사하러 간다고 다들 말을 하제. 김장도 하러가고, 목욕봉사도 하고, 내가 못 움직일 때꺼지는 할끼다. 각 면에 도움받을 사람들이 다 있다. 맨날 병권이 옴마라 캤는데…. 요새는 명자를 많이 찾대. 병원이든 복지관이든 오데 가몬 이명자 씨, 이명자 엄니 하고 부른다아이가. 할매 되니까 울 아부지 지어준 이름으로 부르네. 요서 찾고 조서 찾고…. 아직 필요한 사람이라꼬 찾아주니까 고맙제."

명자 할매는 여자들 팔자라는 게 아들딸 쌔빠지게 키우고 시댁 식구며, 남편이며 다 상전들처럼 떠받들고 사는 거였다고 말한다. 어른들이 그리 하라고 하니까 했지 다시 하라면 못할 일이라 했다.

"아이고, 다시 돌아가라모는 나는 몬 간대이. 지금이 만고강산 땡이다. 고마 인자 내 세상이다."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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