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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14) 진주성 주변

진주골목 사라진 자리 100년 만에 드러난 외성
대첩광장 조성과정서 사라진 장어거리·여인숙골목 외성 발굴돼 비상한 관심
임진·계사 순의비 대비적 인사동 골동품거리는 여전

이일균 기자 iglee@idomin.com 2018년 09월 19일 수요일

2006년 9월 18일 자 <경남도민일보>에 '골목과 사람(26) 옛 영남의 관문 진주성 일대'가 실렸다.

"진주의 골목 나들이를 고도의 발원지인 진주성에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시 기사 속에는 진주성 앞 전경이 이렇게 묘사됐다.

▲ 진주성 정문의 장어거리 또한 명물이었다.

"진주성 주변에는 관광지에 걸맞게 명물 거리가 여럿이다. 정문 앞의 장어거리와 그 뒤쪽 가구거리, 진주성 북장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동품거리가 진주성을 끼고 돌아다니기 알맞게 자리를 잡았다. 제각각의 거리마다 애초에 생긴 내력이 달랐고, 만나는 사람마다 골목과 같은 인생의 굴절이 느껴졌다. 진주성은 역사를 담고, 이들 명물 거리는 사람과 삶을 담고 있었다."

12년이 지난 8월 어느날 진주성 앞.

장어거리, 여인숙골목, 가구거리?

흔적조차 없다. 허무니 허탈이니 무상이니 하는 일말의 감정이 끼어들 틈도 없다. 완벽한 '無'다.

▲ 현재 진주성 입구는 이전의 모든 건물을 헐고 진주성지 조성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대첩과 순의(殉義)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 진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을 둘러보는 경로는 올 때마다 다르다. 10대 때와 20대 때, 10년 전 40대 때와 오늘 50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달라졌다.

촉석루에 오르고, 의기사의 논개 영정과 그 아래 의암을 구경하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 박물관을 보고 나오는 게 예전 경로였다.

12년 전 기사 속 진주성 모습은 이랬다.

"진주성 안을 걷는 길도 코스에 따라 재미가 다르다. 으레 촉석루나 의기사, 의암바위 코스를 걷게 되지만 북장대와 서장대 쪽으로 성곽을 따라가는 경로도 있다. 아담한 산책로의 맛이 있는데다 성 밖 골동품거리의 석물 진열을 멀찌감치 조망하게 된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의 관문이자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이었던 영남포정사 앞에 서면 이런 글이 있다.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질 때까지 이곳이 경남의 중앙이었다. 이 건물을 본떠 또 다른 영남포정사가 도청 소재지인 창원 용지공원에 있다.'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작인 국립 진주박물관은 예전의 따분한 틀을 벗었다."

오늘은 그때 찾지 않았던 곳을 찾기로 했다.

순의단을 한 바퀴 돌면서 비문 문장과 동판 하나하나 꼼꼼히 보았다. 비문의 정식 명칭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대첩을 추앙하고,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 싸움 때 희생된 7만 명의 주민과 병사를 추모하는 곳이다.

임진년 대첩과 계사년 순의비의 극단적 대비….

김시민 장군 휘하 4000명의 병사가 왜군 3만 명을 섬멸한 대첩은 빛났고, 왜군 10만의 서슬에 전멸당한 진주시민과 병사 7만의 기록은 초라했다.

오히려 비극이 더욱 선명해야 하는 것 아닐까?

▲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과 병사들을 돌에 새긴 부조./이일균 기자

▲ 1593년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와 시민들의 모습을 새긴 부조. /이일균 기자
◇인사동 골동품거리

순의단에서 영남포정사, 북장대를 거치는 길에서 진주박물관의 수려한 외관을 감상한다.

이어 서장대 아래 창렬사에서 전쟁에서 산화한 김시민, 김천일, 최경회, 황진 장군 등 39명의 위패에 향을 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십수년째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우효(78·진주시 본성동) 어르신의 참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諸將軍卒之位' 비석 앞에서 어르신이 일화 하나를 전했다.

"1962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게 한 비석이에요. 그때까진 장군들 위패밖에 없었지. 병사들 희생을 추도하지 않아서야 되겠냐는 뜻이었지요."

2006년 9월 18일 자
진주성 서문을 빠져나와 마주한 인사동 골동품거리.

진주성 앞 골목은 허망하게 사라졌지만, 인사동 골동품거리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구석구석 즐비한 장독, 다양하고도 기기묘묘한 석물에 요강까지, 10년 전 길 뒤쪽에 있던 달마상은 길 앞쪽으로 진출했다.

"천 원짜리 놋숟가락부터 몇 억대 자기까지 없는 게 없다"던 목예사 심재명(당시 50세) 대표. 12년 전 그는 덧붙였다.

"골동품 하나하나에 사람 인생 같은 사연이 안 있습니꺼. 그걸 알면 그냥 물건 같지는 않지예."

목예사란 간판도, 심재명 대표도 지금은 찾을 수 없었다. "시외로 이사 갔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때 사진 찍기를 마다하셨으니,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들 제 사연 갖고 있을법한 조각들을 마주했다.

▲ 높이 4~5m인 성곽 100m 정도가 100년 이상 매장 상태에서 벗어났다.
◇급변

그리고 9월 어느날, 벼락같은 일이 벌어졌다.

진주성 앞 지하에 100년 이상 묻혀있던 외성 성곽 일부가 발견됐다. 완벽하게 '無'가 돼버렸던 그곳 땅밑에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 같은 성곽이 숨쉬고 있었다.

관련 기록은 이렇다. "작년(정조 11년·1787년) 장마로 인해 촉석산성이 무너져 올해(정조 12년) 2~9월까지 수리를 마쳤다는 것인데, 촉석산성은 진주성의 이명이며 진주성이 경상우병영 성이므로 병사가 보고한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려 하는 아둔함이라니….

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이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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