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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열전] 하동군 북천면 차인순 엄니(첫 번째 이야기)

엄니의 세월은…뼈아픈 우리 현대사다
철공소 기술자 아버지 따라 3살 만주행…해방 뒤 귀향 살벌함 속 죽을 위기 넘겨
아들 낳으려는 어머니 위해 암자 드나들며 불심 깊어져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피해 방공호 '숨바꼭질'기억도 전쟁통에 졸업장도 못 받아
새신랑 한 달 안 돼 군대로…열두 명 식구들과 시댁살이

권영란 시민기자 webmaster@idomin.com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울 아버지가 철공소를 했어예. 이거저거 잘 맹그니까 기술자로 간 거래예. 3살 땐가 만주로 갔다는데 내는 기억에 하나도 없고. 해방 무렵인가 그때 만주에서 조선 사람을 쫓아내삘 때라서 잡혀가꼬 욕볼까봐 오밤중에 맨몸으로 나와야 했어예."

1938년생 하동군 북천면 차인순 엄니.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가 고향이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만주로 일가족을 데리고 갔다가 해방 직후 고향으로 들어왔다.

▲ 하동군 북천면 차인순 엄니. /권영란

◇만주서 겨우 살아 돌아왔지만 또 난리통이라

"낮에는 못 걷고 밤에만 걸어서 우짜든지 고향으로 오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언니하고 나 둘이를 데꼬오면서 내를 내내 업고 왔다캐예. 내가 8살인가 그랬는데. 한번은 고마 내를 놓쳐 어디 탁 골짜기 밑으로 떨어졌는데 울 아버지가 그 산삐알을 타고 내려와가꼬 내를 다시 업고 갔어. 넘들 같으몬 못했을끼야. 아이가 울모는 고마 아를 죽이고 갔다했어예."

아버지가 살벌한 만주지역을 빠져나오면서 인순 엄니를 포기하지 않고 데려온 것은 두고두고 집안 이야깃거리였다. 만주국에 살던 조선인을 다 죽이겠다는 중국 사람들을 피해 한밤중 숨을 죽이며 기어 나오다가 우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를 죽이고 도망쳐 나왔다는 시절이었다.

"그리 살아 들어와서는 악양 입석이 외가 동네라서 그리 갔지예. 참말 밥을 굶고 걷고 기차를 타고…. 강냉이가루 자루를 져다 내리고. 소련서 온다고 기차 꼬페(짐칸)에 있는 걸 내다가 핥아먹기도 하고…."

인순 엄니는 2남3녀 둘째딸이다. 내리 딸 셋을 낳고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동네 뒤 작은 암자에 공을 들이러 다녔다. 한 달에 세 번 이렛날이면 절에 갔다. 그때면 10살 난 어린 인순도 데리고 갔다.

"이레를 짚는다고 했어예. 난중에는 울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내 혼자 절에 댕겼는데 바윗돌을 오르고 좁은 길을 가야 했어예. 10살이었는데. 바구니에 초, 미역, 쌀을 이고 갔는데 두 번이나 쏟아삤어. 도착해서는 스님한테 쏟았다고 얘기하니 괘안타고 얘기해. 그래도 엄니한테는 말 안 했어예. 나중에 스님이 어른들한테 그러더래요. 그리 조깨넌게 그리 절을 마이 하더라고 뭣도 모르고 뭣을 안다고 그리 절을 하더라 했대예."

어린 인순은 눈이 와도 가고 비가 와도 절에 갔다. 열 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닌 덕분인지 지금도 불심이 깊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이렛날이나 칠석 백중 등 절에 행사가 있으면 꼭 간다.

"부처상을 안 모시고 조그만 돌 하나를 모신 절이었어예. 그래가꼬 어머니가 남동생을 낳았는데 '애기를 타왔다'고 얘기했어예. 그리 공을 들여 자식을 받으모는 공을 끝까지 잘 들이야 허는데 그리 안 해서 그런지 동생들이 제대로 안 됐어예."

한국전쟁이 났을 때 인순 엄니는 13살이었다. 하동군 지리산 자락에는 그 이전에 벌써부터 여순사건으로 진압당한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마다 흉흉한 이야기가 돌았고, 전쟁이 터지자 한국군, 미군, 인민군이 들어왔다가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클 때는 반란을 겪었잖아. (여·순)반란군이 오더만 난중에는 인민군이 내려오고 딸애들을 잡아간다고 말이 돌아 딸애들이 전부 숨었어예. 쌀도 뺏어간다카고…. 인민군이 올라가고 난 뒤 미군 코재이가 왔다카더만 보지는 몬허고 말만 들었어예. 북천에서 하동읍으로 가는 새재에서 작전이 있어가꼬 미군들이 마이 죽었다카더마는. 인민군들이 내려왔을 때 못 올라가고 학교에 대대본부를 채리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난리통에 다치고 죽기도 하며 온갖 고생을 했지만 철없는 아이들은 같이 몰려다니며 숨는 걸 재미있어했다. 인민군들이 밀려오고 작전을 하고 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은 집을 놔두고 바위틈에 숨고 방공호를 파서 숨어야 했다.

"콩도 볶아 주머니에 넣어가꼬 묵고 보리도 볶아 물도 없이 씹어묵꼬 그랬지. 아이들은 따라댕기는 게 재미있어가꼬. 울 엄니가 전쟁통에 우리 동생을 낳았나보다. 삽짝문에 대작대기를 꽂아 솔잎하고 짚하고 묶어가꼬 숯도 달고, 고추도 달고 그랬으니께."

인민군은 동네에 들어와 면장이나 사람들을 색출해 잡아가고 식량을 달라고 했지만 아이 낳은 집에는 절대 들어가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인순 엄니는 악양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6학년 때 전쟁이 났고 졸업장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공부를 제대로 한 기억은 없다. 어른들은 여자애는 학교 가지마라고 했고 날마다 결석이었다. 친정집은 아버지가 철공소를 크게 해서 경제적으로는 넉넉했다. 덕분에 산으로 고사리를 꺾으러 가본 적도 없고 논이나 밭에 일을 하러 간 적도 없다. 다른 집 여자애들처럼 돈을 사려고 밤새 베를 짠 적도 없다.

"시집갈 거라고 자수 놓고 옷 맨들고 그랬지. 밥상보, 이불보, 전부 준비를 해야 돼. 시집 가니라면 일이 참 많아. 요새는 볼 것도 없어예. 그때는 옷도 여러 개 해가야 되고…. 3년 동안 시집에서 옷 안 해준다고 3년 동안 내가 입을 옷을 맨들어가야 허니께. 버선이며 속치마며, 저고리며 전부 해갔다. 한 죽(옷 10벌)이나 했구만."

▲ 두 갈래 머리를 길게 땋아내리고 벚나무를 배경으로 18살의 차인순 엄니가 새초롬히 앉아있다.

인순 엄니는 동무들과 어울려 수놓고 시집 준비를 하였다. 그래도 언젠가 봄에 꽃놀이도 갔다. 악양 입석 하덕마을은 봄이면 벚꽃이 장관이었다. 지금 화개 10리 벚꽃 길처럼 머리 위로 꽃구름이 일었다.

"벚꽃이 양쪽으로 피어가꼬 하늘이 안 보일 정도였어. 일제 때 다 심었던 거야. 지금은 안 남아있어예. 그걸 다 베어버리고…. 하덕에 사는 내 친구 이정희랑 사진도 찍었는데.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서 길게 늘이고…. 사진이 어디 있을낀데."

60년이 훌쩍 넘은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인순 엄니가 이정희 친구랑 벚나무 아래 나란히 앉아 웃고 있었다. 두 사람 뒤로는 온통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인순 엄니 열여덟 살 무렵이었다.

22살 무렵 차임순 엄니가 그때 유행하던 '비로드 한복'을 곱게 입고 찍은 사진.

◇시집갔더니 22일 만에 신랑은 군대 가고

인순 엄니는 20살에 결혼했다. 윗동네 입석마을 사는 총각 이창수 씨였다. 이 씨는 솜씨 좋고 인물 좋고 9남매 중 셋째였다. 친정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 했다. 동네 중매쟁이가 나서 혼사가 성사됐다.

하지만 결혼한 지 2주일 만에 새신랑한테 영장이 나왔다. 신랑은 실제 나이는 24살이지만 호적 나이가 21살이라 아직 군대를 가기 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는 군대를 안 가려는 사람이 많아 미리 영장을 발부하지 않고, 입대일 5~7일 전 코앞에 닥쳐서야 영장을 발부했다. 거의 강제 징집이다시피했다. 인순 엄니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새신랑을 군대에 보내야 했다.

시집간 지 두 해나 됐을까. 한 동네 시집온 동무들끼리 하동읍내 구경갔다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차인순 엄니.

"그해 11월 12일 결혼해서 12월 4일 신랑이 군대를 가는데 그날 눈이 오데예. 악양면에서만 74명이 가니까 환송식을 엄청시리 크게 했어예. 학교서 모여가꼬…. 눈은 팡팡 오는데 트럭을 타고 갔삤어예. 그 트럭이 진주 천전초등학교까지 가고 그서 다시 흩어진다카대예."

이제 갓 결혼한 새신랑과 새각시는 몇 마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인순 엄니는 쏟아지는 눈 속에서 트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인순 엄니는 열두 명이나 되는 시댁 식구들과 살아야 했다. ▶다음 회 계속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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