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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열전] 진주시 주약동 김덕업 엄니

"살림 허투루 안 쓰고 그 시절 다 지나왔네"
남해 출신…신혼 초 군대 간 신랑
힘든 시집살이·늑막염 겹쳐 고생
보증 잘못 서 오랫동안 형편 궁해
교사 남편 도시락 매일 챙겨주며
알뜰한 집안일로 여섯 식구 건사

시민기자 권영란 webmaster@idomin.com 2018년 11월 12일 월요일

"우리 아버지 엄니는 와 공부하라는 소리를 안했었고? 내는 공부해라 소리 좀 들어봤더라면 싶었어. 요새 아이들 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샀는 걸 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김덕업(83) 엄니. 1937년 음력 12월 14일생.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 곡내마을이 고향이다. 설을 앞두고 태어났고 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덕업 엄니는 2남 1녀 중 둘째였다.

▲ 남해읍이 고향인 김덕업(83) 엄니.

◇인민군은 여수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

"내는 남해공립국민학교, 남해중학교를 졸업했어. 남해중학교가 남녀혼합 학교에다 남자는 세 반이지만 여자는 한 반뿐이었어. 그때도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경쟁률이 셌어. 우리 동네에는 내 혼자 댕깄다. 오빠 학교 보내느라 논 팔았는데 내가 공부 잘해도 큰일이었제. 또 논 팔아야 하니까."

남해대교가 생기기 훨씬 전이었고 여자 아이가 남해 섬에서 진학을 위해 육지로 나간다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학교가 재미있었고 공부도 잘했지만 고등학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공부하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딸내미가 진학시켜달랬으몬 큰일이다아이가. 내는 그 당시 와 진주여고 갈 생각을 안 했으까. 함 졸라보기나 할 걸."

1950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남해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덕업 엄니가 2학년 때 남학생 여학생 건물을 따로 쓰기 시작했고, 엄니가 졸업하고 난 뒤에는 남해중학교와 남해여자중학교로 분리됐다.

▲ 남해중학교 졸업 사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40일 남짓 지났을까. 여수에서 배를 타고 남해 서면으로 들어온 인민군은 다시 남해읍으로 들어와 전체 학생들을 운동장에 소집했다. 이 증언은 덕업 엄니와 남해중학교 동기였고, 하지만 학교 때는 서로 얼굴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남편 박일래(82) 씨가 거들었다.

"방학 중이었는데 학교 운동장에 모두 모였어. 우리한테 노래를 가르쳐줬는데,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라, 앞으로 나아가자…' 이런 가사였어. 그때 우리 학교 선생 중에 한 사람이 좌익이었는지 우리한테 가르쳐줬어. 그 선생이 선창을 하면 따라 불렀으니까."

기억으로는 딱 이틀 동안 학교 운동장에 소집됐다. 인민군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남해에서 완전 철수를 했기 때문이다.

"남해는 인민재판이 안 열려서 인명 피해도 하나 없었어. 다음날이 인민재판을 여는 날이었는데, 그 전날 인민군들이 철수했어. 내가 알기로는 배를 타고 하동으로 넘어갔댔어."

남해는 1973년 남해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인근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남해읍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여수에서 노량으로 오는 정기여객선을 타야 했고, 여객선은 다시 삼천포항에 들렀다가 통영에 들렀다가 마지막에 부산항에 닿았다.

▲ 스무 살 처녀시절 친구들과 읍내 남해사진관에 가서 차례로 찍었다.

◇초임 발령 남편 따라 짧은 신접살림

"자랄 때는 제법 여물었는데…. 일을 별로 안하던 사람이 시집가자마자 일을 마이 해서 그런가. 쌔가 빠지게 일하느라…. 내가 꾀를 부렸어모는 그리 안 아팠을까."

1958년 덕업 엄니 22살이었다. 남해읍에서 설천면으로 시집을 갔다. 신랑은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교)를 다니는 키가 큰 청년이었다.

▲ 결혼하기 전 집안 어른들께 인사하는 날 찍은 사진.

"내가 1월 5일 시집을 갔는데, 신랑이 2월 말에 군대를 갔어. 논산훈련소 갔다가 창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아갔다는데…. 그때는 36개월이니."

덕업 엄니는 시집간 지 2개월 만에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시댁은 원래 살림이 넉넉한 집안이었지만 덕업 엄니가 시집갈 무렵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시삼촌이 일본 조도전대학(와세다대학)을 나왔는데 남해에다 백화점을 내겠다고 설치면서 재산을 탈탈 털어먹고, 해방되고 난 뒤에는 적산물자 트럭을 사서 뭐 한다 그러다가 불법이라고 경찰에 다 뺏긴 거야. 그걸 찾을라꼬 또 재판을 8년 동안 매달렸다더만."

갓 시집온 덕업 엄니한테 시어머니는 "다 망해묵꼬 바늘 한 개 넘어질 땅도 없더라"라고 말했단다.

낯선 시집살이와 매일 계속되는 노동 때문이었을까. 덕업 엄니는 시집간 지 1년이 지나 늑막염에 걸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찌 그리 일이 많은지. 우리 집은 밭이 많지 않았는데 밭이 많아서 한나절 내내 김을 매모는 저 끝까지 하기가 힘들었어."

신랑도 없는 시집에서 새 며느리가 아파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급기야 시집에서는 쉬면서 병 고쳐오라고 친정에 보냈다.

"친정 갔더니 아버지가 병원에다 한 달 입원을 시켰어. 그래 좀 나아 친정에 들어갔는데 자꾸 재발이 되는 거라. 그 뒤로 1년 동안 친정에 있었다."

1960년 무렵 친정에 있을 때였다. 그해 12월 말 남편이 제대를 했다. 그리고 1개월 뒤인 1961년 1월 말 남편은 창선면 창선초등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남편은 창선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다. 덕업 엄니는 몸이 안 좋아 남편을 따라 가지도 못하고 통원 치료를 받으며 친정살이를 하고 있었다. 덕업 엄니가 당시 다니던 병원은 남해읍 최의원이었다. 지금 남해병원의 전신이라 한다.

그해 추석 무렵이었다. 남편을 따라 창선 하숙집으로 갔다.

"친정에 있는데 어느 날 일요일 갑자기 남편이 왔더라고. 그래 내도 따라가까? 가보까라고 말했지. 그래가니까 하숙집 할매가 냄비하고 갖다주몬서, 박 선생 혼자 있는 거 못 보것다 고마 요 있어라, 둘이 사는 거 냄비에 끼리무몬 된다 이러는 게야."

며칠 갔다올 거라고 입은 옷에 무작정 나선 걸음이었다. 창선에서 짧은 신접살이를 하게 됐다.

◇자식 넷 낳고 진주 나와 그 후 40년

창선면 수산리 그 하숙집에서 살림을 산 지 한 달 조금 더 됐을까.

"날은 점점 추워지고 옷은 챙겨간 게 없고…. 그래 내가 춥다하니까 영감이 고마 집에 가라 이러는 게야. 그게 또 얼매나 서운하던지. 춥다하몬 내복 사줄 생각은 안하고 집에 가래니…. 나중에 생각허니 그때 임신을 해서 더 추웠던 게지."

시집간 지 4년 만에 가진 첫 아이였다.

2년 뒤 남편은 설천면 진목초등학교로 발령받아 본가로 돌아왔다. 덕업 엄니는 그 사이 큰아들을 낳고 두 해 뒤에 다시 작은 아들을 낳고 그 뒤로 딸 하나와 아들을 2살 터울로 내리 낳았다. 그러는 사이 남편은 다시 고현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설천 본가에서 제법 먼 길이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줬다.

"자전거 타고 논두렁길을 씽씽 잘 댕겼다. 도시락 싸주몬 자전거 뒤에 달고 그리 댕깄는거지."

당시 교사 월급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다른 공무원들보다도 더 적었다. 거기에다 친척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다 떠안는 바람에 매달 이자 내고 하숙비 내고 나면 돈 구경은 하기 힘들었다.

"그 보증때매 20년을 애썼다. 우리 애들 뭐 시원스레 해준 게 없어. 넘들은 교사라면 아무리 박봉이래도 그래도 여유 있겠지 그러는데 말도 못해. 그 세월을 어찌 지나왔나 싶어."

농사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해는 들이 없어 다들 땅 한 뙈기가 귀했다. 대부분 1~2마지기, 좀 많으면 3마지기, 5마지기가 넘어가면 그 동네 부자였다. 한 가지 수확해서 거두고 나면 다시 그 땅에다 뭔가를 심고 다시 수확 후 심어야 했다.

"그러니 땅이 고생을 한 거제. 놀릴 새가 없었어. 사람들도 억척시리 일하고… 손바닥만하니 빈 땅이 보일만하몬 일을 하고… 뭐 이런 데가 있노 싶제."

1977년 덕업 엄니 마흔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진주로 이사 나왔다. 남편은 2년 뒤 진주 인근으로 발령을 받아 나왔다. 당시 상봉동에 700만 원짜리 집을 사서 여섯 식구가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아무리 집안 형편이 궁해져도 덕업 엄니는 남들처럼 억척을 떨면서 살림을 꾸리거나 돈을 벌러 다닐 수는 없었다.

"평생을 아파 지내니 옆에 사람들 고생을 마이 시켰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우짜든지 살림을 쪼개고 쪼개 허투루 쓰지 않는 거였제. … 그러게, 그러고로 시절 다 지나왔네."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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