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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평야 일대 근대건축물] (하) 동아일보에 안 나온 시설

대산평야 핵심시설 본포양수장, 풍년 기원 통수식 해마다 개최
지금도 쓰이는 수문·수조·수도 체계적인 관리·보전 필요성 커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9년 04월 16일 화요일

▲ 둘레를 모두 석재로 마감한 본포양수장 수문.

◇통수식 행사장 본포양수장 = 이처럼 동아일보 보도를 지침 삼아 일제강점기 수리시설을 찾으려고 창원시 동읍·대산면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니 보도되지 않은 근대 건축물들까지 눈에 띄었다. ▶10일 자 20면 보도

본포양수장의 수문과 수조를 먼저 들 수 있다. 본포양수장은 "재래답 200정보 개답에 적당한 초생지 기타 80정보 재래전 1070정보 도합 1350정보(1정보=3000평)를 관개하는 계획"에서 핵심이다. 동아일보는 관련 설비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동면 본포리 낙동강 경계 수면에서 매초 99입방척(약 3.7t)씩 28척을 양수"한다고만 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한국농어촌공사(창원지사)는 해마다 4월이 되면 여기 본포양수장(동읍 본포리 208 일원)에서 통수식을 치른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다. 낙동강에서 물을 퍼올려 여기 수조에 담았다가 수로를 거쳐 들판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 , 낙동강에서 퍼올린 물을 담았다가 수로를 통해 들판으로 보내는 본포양수장 수조.

◇석재로 마감한 수문과 콘크리트 수조 = 수조는 본포양수장 마당 한가운데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팔각형이다.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와 나가는 출수구에는 수문이 두 개씩 있는데 입수구는 둥근 철문이 달려 있고 출수구는 네모 구멍만 있다.

수문은 본포양수장 2층 높이 건물 뒤편에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커다란 물웅덩이가 가로 25m, 세로 6m정도 되는 직사각형으로 나 있었는데 사방 모두 우툴두툴한 천연암반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낙동강 쪽으로 두 개 마련되어 있는 수문은 너비가 2m 남짓이고 기둥이 그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유등중앙배수문과 마찬가지로 수문과 기둥은 물론 양쪽 벽면과 위쪽까지 길고 네모나게 다듬은 석재로 꾸며져 있었다.

낙동강에서 물이 드는 수문 입구는 양수장에서 나가 낙동강 위에 나 있는 자전거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천연암반을 뚫은 구멍이 나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나 마감은 없었다. 아래쪽은 철망이 쳐져 있고 그 위로 한국수자원공사의 취수시설이 너비 5m, 높이 15m 정도로 놓여 있었다.

▲ 낙동강 쪽에서 바라본 본포양수장 수문.

◇북부배수문과 분삼배수문 = 다음은 북부배수문이다. 유등중앙배수문에서 서쪽으로 2㎞ 남짓 떨어진 대산면 북부리 198-2 일대다. 한국농어촌공사(창원지사)에 따르면 이 배수문은 길이가 40m 안팎으로 바로 옆에 북부1배수장·배수문을 새로 만든 1984년부터는 쓰지 않고 있다. 천연암반을 뚫고 통로를 네 개 내었는데 상하좌우 바위 표면을 모두 콘크리트를 발라 마감했다. 동아일보 1927년 보도에는 언급이 없으므로 당시 축조되지는 않은 듯하다. 1936년 8월 대홍수로 여기 제방이 무너졌으므로 그 뒤 복구 과정에서 설치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밖에 제1호수도 바로 동쪽에 붙어 있는 분삼배수문(동읍 노연리 710-4 일대)도 있다. 홍수 때 불어난 물을 북쪽 낙동강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는 콘크리트 시설물이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졌고 철재 부분은 이후 새로 설치되었다.

▲ 본포수도 내부 모습. 전체 길이는 120m 남짓 된다.

◇준공 연월 적혀 있는 본포수도 = 분삼배수문 남쪽 620m 지점 동읍 봉강리 429 일대에는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시설이 있다. 본포양수장에서 끌어올린 낙동강 강물을 주남저수지까지 끌어가기 위해 야산 아래쪽을 뚫고 만든 콘크리트 터널이다. 길이가 120m 남짓 되고 높이는 3∼4.5m가량이다. 세로 80㎝, 가로 50㎝ 크기로 한가운데 박혀 있는 돌액자에는 두 줄로 '대정 12년 5월 준공(大正 十二年 五月 竣工)'과 '본포수도(本浦隧道)'가 새겨져 있다. 대정 12년은 서기 1923년이다. 왼쪽에는 세로로 '장락길(長樂吉)'이 적혀 있는데 사람 이름인 것 같다.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 일대 근대건축물이 10개 남짓으로 적지 않지만 이 가운데 명칭과 준공 연월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된 시설물은 이 본포수도와 1912년에 완성된 주천갑문(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두 개가 전부다.

본포수도는 당시 동아일보의 대산수리조합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대산수리조합의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촌정(村井)농장'에서 축조했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이 농장의 주인은 1905년부터 여기서 농지를 개척하고 조선 농민을 소작인으로 부린 일본의 연초왕(담배 재벌)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1864∼1926)였다.

◇농업·농민 역사 담겼지만 관리·보전은 부족 =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100년가량 유지되어온 낙동강과 대산평야의 수리시스템을 이번에 제법 확인한 것은 작지 않은 성과다. 창원시청은 물론 경남도청도 힘을 합쳐 미진한 부분을 더 조사하도록 해서 일대의 수리시스템 전모를 밝히면 교육·학술에 더해 관광까지 등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은 "제1호수도와 유등중앙배수문·분삼배수문, 본포양수장의 수조·수문, 본포수도 등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화석화된 유물이 아니고 지금도 긴요하게 쓰이는 살아 있는 농업수리유산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더 크다. 최근 제2호수도가 인멸된 데에서 보듯이 생명력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호하고, 개보수를 할 때도 원상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산수리조합과 촌정농장은 근대 토목기술을 들여와 주남저수지를 축조하고 황무지를 농경지로 바꾸고 천수답·재래전(밭)도 수리안전답으로 개답했다. 이를 위해 수로를 내고 터널을 뚫는 데는 조선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따랐고 결과는 조선 소작농에 대한 수탈과 생산된 곡식의 일본 반출로 나타났다.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 일대의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동원되어 피땀으로 이룩한 근대농업유산이다. 지역 농업과 농민의 역사가 담겨 있지만 관리·보전은 충분하지 않다. 근대문화유산 문화재로 등록·지정되어 있지 않고 경남도청의 근대건축문화유산(www.gyeongnam.go.kr/archi_heritage) 목록에도 올라 있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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